오늘은 제 통근 얘기를 해볼까 해요.
제가 통근을 한 건 2011년 12월부터니까 그리 오래된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제 일상에서 꽤나 큰 부분이기도 하고, 이 글을 쓰는 것도 통근하면서라서 그냥 써보기로 마음먹었어요. 뭐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에요.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맞으며 집에서 나와 작은 길 세개를 건너면 Golden Gate Park 바로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요. 거기서 5번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와서 30번이나 45번 버스로 갈아 타고 기차역으로 향합니다. 기차로 50분쯤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마운틴뷰 역이 나와요. 회사는 역에서 걸어서 3분. 조금씩 편차가 있긴 하지만 집에서 나와 회사 문을 열기까지 보통 두시간 정도. 거리로는 동대문에서 인천공항 정도가 되겠군요.

첫 몇 달은 음… 뭐랄까, 누가 제 하루의 양 끝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고 꾹 찌부러뜨린 것 마냥 빨리 지나갔어요. ‘아 이제 월요일이구나!’ 하고 깨닫기가 무섭게 또 월요일. 세어보면 그것도 몇주가 이미 흘러버린 다다다다음 월요일, 이런 식으로요. 물론 일이나 사람들 같은 새로운 환경 탓이 훨씬 컸을텐데, 엉뚱하게도 저는 애꿎은 통근 시간만 나무랐어요. 시어머니 성화에 뿔난 며느리가 부엌 강아지한테 화풀이하듯이.

안되겠다 싶어 이런 저런 시도를 해보기 시작했어요. 첫번째 시도는 통근 시간 기록 레이스였어요. 다른 노선을 탈 때마다 구간별 시간을 기록하고 통계를 내서 어떤 조합이 가장 빠른지 알아보려고요. 덕분에 어느 시간대에 어디서 어떤 걸 타면 조금 덜 붐비고 편하게 갈 수 있는지 이제 조금은 감이 옵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감’이라 그다지 신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에요.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인데, 이를테면 누군가의 차 엔진에 문제가 생겨서 기차선로에 멈춰버린다거나, 어딘가에서 깜짝파티가 있어서 그 파티에 가는 사람들이 잔뜩 버스에 탄다거나 하는 건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방향을 바꿨어요. 어차피 시간을 물리적으로 단축하는데 한계가 있으니 그 시간이라도 효율적으로 활용해보는 방향으로. 그래서 회의 준비도 하고 이메일도 확인하고 진행중이거나 다가오는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리서치도 하고.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그런데 정작 회사에 도착할 무렵이면 전 이미 넉다운. 시도는 좋았으나 의욕이 너무 앞섰던 거예요.

그래서 한 번 더 방향을 틀었어요. 너무 제 자신을 닥달하지 말고 유연하게 그날 그날 하고 싶은 거 하기로. 전날 잠이 부족했으면 좀 자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창 밖 보면서 음악만 듣기도 하고, 지금처럼 이렇게 글을 쓰기도 하고요. 그러고 나니까 신기하게도 오히려 회사에서 더 상쾌한 기분으로 일할 수 있더라구요.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재미있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낯선 이들이 내 상상 속으로 들어오다.

그 중 하나는, 통근 길에 마주치는 사람들 중에 익숙한 얼굴들이 생긴 거예요. 보고나면 “아, 저 사람!” 하게 되는 사람이야 조금 더 있겠지만, 눈을 감고도 떠올릴 수 있는 얼굴은 다섯 쯤 됩니다. 예전에 썼던 탐앤탐스의 어떤 할머니 이야기처럼 어떤 얼굴이 익숙해지다보면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옷차림이나 표정이나 제스쳐 따위를 이리 저리 끼워 맞춰 어떤 사람일까 상상을 해봅니다.

뭐, 이를테면 이런 거예요.

그 사람은 항상 베레모를 반듯하게 눌러쓰고 짙은 갈색 선글라스를 점잖게 쓰고 나타납니다. 멀리서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어요. 하지만 외모에서 가장 특이한 점이라고 한다면 단연 정갈하게 다듬은 콧수염. 그 콧수염을 보고 있노라면 참… “아, 정갈하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얼마 전에는 끝을 말아올렸는데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 마치 실험 사고로 냉동이 되었다가 5년 쯤 전에 해동된 19세기 영국의 과학자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요즘 옷을 입은 것 같달까. 아침 저녁으로 버스에서 보는데,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서 좇을라 치면 이미 그 사람은 어느샌가 장어처럼 인파 속으로 저 멀리 사라집니다. 뛰어가는 것도 아닌데 눈으로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항상 그러다 보니 어쩌면 제게만 보이는 유령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웃음) 영화 <아멜리에(Le fabuleux destin d’Amélie Poulain, 2001)>에 나오는 사진 속 남자처럼요.

 

매일하는 여행

다른 하나는 매일같이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게 됐다는 거예요. 날씨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제가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는 전형적인 캘리포니아의 화창한 날씨와는 조금 달라요. 비, 안개가 잦고 바람이 많아 쌀쌀한 편이거든요. 하루는 친구와 한 시간쯤 북쪽에 있는 작은 도시에 차를 타고 놀러간 적이 있는데, 목적지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나가려던 순간 갑작스레 들이닥친 후끈한 공기에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문을 쾅 닫고 앉았어요.

“이건 뭐지… 이건 도대체 뭘까…”

분자 단위로 산산이 흩어진 정신을 가까스로 주워담고 온도를 확인해보니 섭씨 37도. 같은 시간 샌프란시스코는 섭씨 23도. 고작 한 시간 거리인데 무려 10도가 넘게 차이가 났던 겁니다. 남쪽으로도 사정은 비슷해서 출근하면서는 외투를 하나 둘씩 벗는 게 당연해졌어요. 물론 올 때는 한겹씩 도로 걸치구요. 그러고 보면 북풍과 태양 이야기의 사내가 된 것 같네요. (웃음)

이렇게 창밖으로 달라지는 풍경과 날씨에 여행길의 설렘이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마치 여행에서 돌아오는 기분과도 비슷해요. 다운타운을 지나면서 매일같이 길에서 드럼을 치는 그 사람과, 갖가지 표정의 낯선 사람들을 구경하는 건 마치 여행 끝에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수속을 밟는 것과 같아서, 이 의식을 전후로 마법같이 마음가짐이 확 바뀝니다. 일과 일상 간의 모드 전환이랄까요. 그런 활기찬 분위기를 뚫고 집에 도착할 무렵이면 이미 제 마음은 풀어질 대로 풀어져서 근심도 고민도 이미 안녕.

통근길이 먼 건 분명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즐거운 일들도 많은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혹시 압니까 오늘 그 유령같은 남자의 정체를 벗겨낼 수 있을지. (웃음)

오늘의 곡은 Ceslo Fonseca의 Slow Motion Bossa Nova예요. 어느 퇴근 길 제가 짊어지고 있던 온갖 근심과 걱정을 여과지처럼 흡수해버린 보석같은 곡이예요. 이곡처럼 사랑 넘치는 하루, 이곡처럼 따뜻한 새해 되길 기도하며 당신께 이곡을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