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에는 매화니 산수유니 하는 봄꽃들이 피기 시작했다는 소식입니다. 통나무 한가운데 자리잡은 아버지의 영산홍도 봄을 맞을 준비가 되었나 봅니다. 뒤집어 쓰고 있던 마음의 외투를 한겹 두겹 벗을 때가 된 것 같군요.

지난 겨울 저는 관성을 끊고 마음의 경영을 위한 시간을 보냈네요. 그러는 동안 My favorite things 리스트에는 이런 저런 것들이 추가되었구요. 이러다간 정말 큰일 나겠다 싶어 시작한 운동, 가장 느린 걸음으로 하는 깊은 산책, 스위치를 끄고 일기와 한없이 솔직해지는 시간, 부드럽게 내려오는 물줄기에 부풀어오르다 꺼지길 반복하는 커피의 호흡, H와 함께하는 목요일 밤 movie night의 밋밋한 맛, 소탈한 주인장과 어딘지 맹꽁이같은 고양이가 맘에드는 어떤 라면가게… 나중에 생각하면 인생의 계기가 되었던 것들이 있죠. 아마 그런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그러던 사이 부모님께서 귀향을 결정하셨어요. 저 남쪽 산골짜기에 조그만 집을 하나 지으신다고. 전부터 생각하고 계셨던 거라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너무 평온한 표정들이셔서, 행여 일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마음의 속도가 못따라와주는 건 아닐까 하고 내심 쓸 데 없는 걱정을 잘도 찾아서 합니다.

그렇게 정작 당신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혼자 복잡해하고 있는 것 같은 데서 오는 무안한 마음 카드부터, 삶의 큰 변화를 이리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까지 두 분께서 헤쳐오셨을 크고 작은 삶의 물결들로 그려낸 썩 괜찮은 인생 그림에 대한 감탄과 감사의 마음 카드까지 셔플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두 분의 청춘과 제 유년기의 배경이 되어준 이 동네와 함께하는 마지막 밤이 깊어갑니다.

이렇게.

그렇게.

인생을 걷고 있는 분들께 보냅니다.
Bill Evans Trio의 Come Rain or Come Shine.

Cheers,
Carlos